올해는 마가 씌운 해인 게, 할부금을 반도 못 낸 노트북을 달랑 잃어버린 것뿐 아니라, 자잘하게 이것저것 많이도 잃어먹었는데 그 중 하나가 또 만년필이다. 1월에 한 자루 잃어먹고, 똑같은 모델로 작년에 선물받아 보관해 두었던 만년필을 꺼냈다가 전주에서 또 달랑 잃어먹었다. 라미 사파리 갈색이었는데, 특히 저 1월에 잃어먹은 놈은 내 돈 주고 처음 산 놈에 J.랑 커플 만년필로 산 것이고, 그간 꽤 길을 잘 들여놨던 놈이어서 더 황당하더라. 가방에 곱게 꽂아놓은 놈이 도망간 거라 더 화가 나기도 하고. 이미 만년필 쓰기에 길들여진 손인지라 다른 펜들한텐 계속 불편함을 느끼기에 이번에 다시 한 자루 장만했다. 찾아보니 파카에서 나온, 학생용으로 아주 싼 모델 - 만원이 채 안 되는 - 도 눈에 띄던데, 원래 사람 입맛이라는 게 한번 뭘 써보면 그 다음엔 더 좋은 거, 비싼 거 써보고싶은 법이라... 이번엔, 지난번보다 돈을 좀 들였다. 그래서 새로 영입한 게 이놈이다.
근데 라미 거는 지난 번도 그렇고 이번도... 이미지를 보고 기대하다가 실물을 받아보고 나면 "...엥?" 싶은 면이 있는 듯. 솔직히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좀 다르더라. 그러나 이미 각인까지 새겨버린 상태고 반품도 할 수 없어, 사은품으로 받은 펠리컨 잉크를 재빨리 채우고 개시해 버렸다. 앞으로 만년필을 다시 산다면, 라미는 반드시 디자인을 실물로 확인해보고 사야겠다고 결심. 그러나 또... 개시해서 좀 쓰고 나니 그럭저럭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는.
필기감은... 좋다. 솔직히 무지 좋다. 사실 써보면 써볼수록 필기감이 너무 좋아 저 엥스러운 마음이 다독여졌다. 원래 라미가 파카같은 전통적인 다른 만년필 브랜드보다 역사가 짧아서 국내에서는 잘 안 알려졌고 인기도 별로 없지만, 이 필기감은 써본 사람들 사이에선 꽤 정평이 나있는 편이다. 파카 비싼 놈보다 라미 싼 놈이 더 필기감이 좋다며 선호하는 사람들도 꽤 있고. 게다가 라미가 다른 브랜드에 비해 좀더 가늘게 써진다는 게 중평. 거기에 나는 또 펜촉이 EF다. (보통은 F가 스탠더드고, EF는 F보다 좀더 가늘다.) 손에 촥 잡히는 감각도 확실히 더 하급모델에 플라스틱 바디였던 지난번 라미 사파리보다 더 좋기도 하고. 이건 아무래도 바디가 덜 뚱뚱한 로고 06이 손이 작은 내게 더 잘 맞는다는 점이 한몫 하는 것이겠지만.
알루미늄 바디에 스텐레스스틸 펜촉. 이것도 너무 좋다. 황금도장 어쩌고는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이어서(난 액세서리도 금 싫어한다.), 써볼수록 뿐만 아니라 볼수록 꽤 마음에 드는데, 다만 유광택 05 모델이 너무 궁금하다는. 저 라미 로고 시리즈 중 내가 산 06은 무광택, 05는 같은 디자인에 광택이 있는 건데, 06이 만원 가량 더 비싸다. 이미지만 봤을 때는 무광택이 좀더 고급스럽겠다 싶어서 일부러 06을 샀건만, 받고보니 이 디자인엔 광택의 05가 더 이쁘겠단 생각이 든다. 음, 걍 광택으로 한 자루 더 사버려?
이번에도 각인은 Veritas Liberabit라 새겼다. 번번이 vos를 생략해버리는 바람에 저 문장만 하면 문법상으로는 비문인데, 우야든둥 동사가 충분히 2인칭 목적격의 존재를 암시해주고 있으므로... 내겐 너무 거창한 문구이지만, 만년필에는 꽤나 잘 어울리는 문구라는 생각. 한마디로 뽀대 난다는 이야기. 그냥 이름자 새기는 것보다야, 내가 평생 붙들 화두를 각인해 놓는 게 더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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