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무리에 숨는 게 더 편할 때가 있다. 국가권력이 불법을 자행하며 인권을 탄압할 땐 적극적으로 대중의 뒤에 숨는 게 더 안전하고 현명한 방책이기도 하고, 지금의 한국은 과거의 한국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아주 약간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대중 속에 숨어 나 자신이 대중의 일원이 되는 것과, '저 대중을 보라!'며 대중을 동원하는 것, 그리고 내가 대중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동원되는 것에 동의하는 건 구분해야 할 문제다. 내 글 "대중타령은 기만이다"는 여기서 저 두번째, 즉 '저 대중을 보라!'며 대중을 자신의 근거로 동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이는 과거 수구세력들이 '침묵하는 다수' 운운했던 논법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들이 위험한 것은, 지식인을 타격하는 척하며 그 자신이 지식인을 대신할 다른 권위를 추구하기 위해 대중을 제 요량으로 동원하면서 그 와중에 논리와 실력이 아니라 알맹이 없는 '선동'을 일삼는다는 것, 이들이 호출한 대중은 실제론 공갈빵이라는 것, 얼마든지 인민의 집단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저열한 수준으로 억지로 묶어두며 또다른 억압을 한다는 것일 게다.
'그 영화'를 보러 간 사람이 다 파시스트에 애국심에 넘어간 사람들이란 말인가? 아니다. 논란이 되니 궁금해서 갔다가 입닫고 분노의 손톱질을 하고 있을 사람이 꽤 있을 거라 생각한다. 소박하게 '힘들었던 누구의 재도전'을 격려하고픈 착한 사람들과,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 역시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란과 호기심과 궁금증을 증폭시킨 기저에 애국심 마케팅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처음 그 영화를 비판했다가 호되게 당했던 사람들이 애국심에 근거해 발길질을 당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호되게 당한 사람들은 있는데 가해자는 아무도 없다 하고, 실제로 실체도 없고(아니 실체도 없는 대중 속으로 숨어버렸고), 그렇기에 아무도 책임을 지려하지 않은 채 저 실체도 없는 '누군가 제3자'를 탓하기만 한다. 내가 '대중' 소리에 자지러질 듯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도 때리지 않았다 하고 그리하여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이에 맞은 사람은 팔다리가 부러져 신음하며 속병까지 얻어 끙끙대고 있는 꼴을 이토록 자주 보는 것이 싫고 두렵다.
지금의 대중은, 인권이 전방위적으로 탄압받던 시기에 그 탄압을 피하며 해야 할 말을 하기 위한 방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도 책임을 전혀 지지 않기 위해 호출되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물론 그런 의도와 목적을 전혀 갖지 않고도 대중을 호출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저지르기 위해, 그리고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리고 그 폭력 자체를 무마하기 위해 대중이 호출되는 횟수가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다. 지금은 대중이 호출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각자의 개성과 주관을 온전히 지니고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인민으로 각자가 걸어나와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식인이 요즈음 이토록 공격받으며 심지어 존재의 이유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지식인의 절대적인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이고, 소위 드러난 지식인보다 뛰어난 범인이 등장할 수 있는 공간과 수단이 쉽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느 지식인보다 뛰어나다고 착각하면서 엉터리 논리로 날뛰며 악만 쓰는 천둥벌거숭이도 그만큼 많아졌지만. 고도의 상징의 시대에는 정말로 말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이것을 쓰는 데엔 그만큼의 신중함과 책임감이 뒤따른다. 나는 우리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신중함과 책임감의 의무를 겸허히 받아들이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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